"High-level reasoning requires very little computation, 

but low-level sensorimotor skills require enormous computational resources."

<Moravec's paradox>



AI에 대한 호기로운 관심부터 인공지능 논쟁에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AI가 인간 삶에 미칠 부정적 영향까지. 사실 인공지능은 과거부터 꾸준히 우리의 관심을 받아온 기술 분야였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부터 더 나은 삶의 수준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편안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해왔다. 그리고 작년,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이세돌에게서 '바둑'이라는 종목으로부터 승리를 따낸 이후 인공지능의 대한 관심은 '기대'보다는 '우려'에 맞추어졌다.


다시 한 번,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낯선 주제나 기술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존의 'Alexa'나 애플의 'Siri' 등 선진화된 인공지능을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눈 여겨봐야할 점은 그러한 인공지능이 행할 수 있는 기능이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알람 설정, 특정 음악 재생 등 단순한 기능의 수행에 그쳤다면, 이제는 'Chatbot'과 같은 기술로 인간 수준의 대화를 행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목소리의 인식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예측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 AI가 가진 부족한 부분은 대화를 함에 있어, 인간 수준의 '공감' 능력을 가지고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공감능력은 고등사고 중에서도 높은 사고력을 요하는 부분으로, 아직까지 AI에게서 인간 수준의 공감 능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현재 AI는 목소리의 떨림 혹은 감정 변화에 따른 신체 변화 등으로 인간의 감정을 판단하고, 그렇게 분석된 Data를 통한 공감을 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인공지능은 Command와 Input에 대한 연산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기에, 그에 반하는 혹은 명령어로 산출될 수 있는 Output 보다 더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정재승 교수를 비롯한 뇌과학자들의 비유에 따르자면 인공지능의 이러한 창의적 일탈이 일어날 확률은 '원숭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타자기를 두들기도록 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올 확률'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우려하면서도 기대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현재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하나의 '인격체' 정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정확히 말하자면 딥마인드가) 작년 전 세계를 강타한 이유는 이처럼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바둑이라는 종목은 체스보다 고도의 사고를 필요로 할 뿐더러 경험과 직관 등 수치화될 수 없는 다양한 외부 요소가 승패에 작용한다고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 전문가들 조차 인공지능이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바둑'이라는 종목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응, 아니야>


그러나 인공지능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강화학습, 머신러닝, 딥러닝 등 나에겐 이름만 친숙한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인공지능이 '바둑'의 최강자들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판 후이, 이세돌, 커제 등 다양한 정상급 기사들을 패전기사로 전락시키며 전 세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 여파는 특히나 우리나라에 크게 작용하여, 정부급 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코딩 의무교육의 시초는 알파고..)


이처럼 날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의 특성 상,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격체와 같은 사고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 단순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정말로 탄생(생명이다, 정말로)했을 때 이후에 벌어질, 그리고 바뀌게 될 우리 사회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냐는 것이다.




영화 <Her>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지금으로서는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며,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라는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본질적 질문, 인간이 인공지능과 달리하는 특성 등 관람객의 사고 정도에 따라 더 깊게 발생할 수 있는 난해한 질문들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을 맞이하기에 앞서 고민해봐야 할 밑그림의 거름이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내 일자리를 앗아갈 인공지능, 성적 분출구가 될 로봇 등.. 인공지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에 대한 찬반양론은 다양한 주제로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사고를 단순한 논쟁거리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이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건강한 사고관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자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이기심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프로그래밍화된 인공지능이 본인들의 회계장부를 맡아주기를 원하게 되면,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일자리가 위태로워 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판례들을 모두 분석한 인공지능이 자신의 변호를 맡기를 원하게 되면, 변호사라는 직업이 위태로워 진다. 나는 편리해지고, 남은 위태로워진다. 그럼에도 본인의 직업에 대한 소멸만을 걱정한다고?


"인공지능과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사랑에는 한 가지 사랑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육체적 사랑만을 좇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칭 Platonic Love이라 불리우는 정신적 사랑만을 좇는 사람 또한 존재한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은?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의 정신적 사랑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현재 세계 각지에서 개발 중인 '섹스 토이'와 인공지능과의 결합을 통해 두 사랑 모두를 인공지능이 취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인공지능은 두 가지 사랑을 모두 충족하게 된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프로그램의 한 패널은 "인공지능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이 될 것이다. 사랑은 일방향적 종속이 아닌 서로 간의 수평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한 사람의 주장이기에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앞으로 호의적 입장을 취했든, 부정적 입장을 취했든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계속해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자신이 계속해서 견지할 수 있는 뚜렷한 사고를 확립하는 것이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여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예비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재승 교수가 강연자로 출연한 '차이나는 클라스' 프로그램의 19화를 시청하였다.

사실 정재승 교수는 인지도 면에서 워낙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학자이기에 모두에게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개발 관련 공부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정재승 교수의 초심자용 과학 관련 도서들을 읽으며 자라왔고,

진중권 교수와 함께 집필한 '크로스'라는 책도 흥미롭게 읽은 경험이 있다. 


때문에 정재승이라는 과학자는 나에게 굉장히 긍정적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최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가지는 파급력이 강해지고, 각계각층에서 이 용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며

이 뇌과학자의 발언에 찬반양론이 발생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였다.


혹자는 이 뇌과학자가 AI의 발전으로 인해 국영수를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하며, 

어떤 이는 정재승이 4차 산업혁명의 여파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실업률이라는 부정적 영향만이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한다. 

나는 '왜 이러한 반 정재승이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고민하며 이 방송을 찾아보게 되었다.


강연을 통해 정재승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지금의 연구원, 과학자들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이끄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Atom(현실)'과 'Bit(online)' 이 두 세계를 정보 통신 기술을 이용해 합치는 데에 있다. 현실 세계의 다양한 기계들이 'IoT'를 통해 연결이 되고, IoT의 운영 및 유지에 있어 필요한 모든 데이터들은 'Cloud'라고 하는 가상의 'Database'에 저장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DB에 대한 빅 데이터 분석을 통해 최종적으로 인간이 원하고, 필요로 할 만한 Data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Desktop Factory'라는 개념 또한 등장한다. 1, 2차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인간 소외 현상'과 자본가에게만 부가 축적되는 문제점에서 비롯된 이 개념은 'Desktop'이라는 개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기업에 대응할 수 있을 만한 하나의 Factory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Desktop에서 시작해 전세계적 미디어로 자리한 마크 주커버그의 Facebook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 3D Printer의 발전과 함께 힘을 얻고 있으며, 유통비의 절감과 창고 및 저장 공간의 불필요 등 다양한 이점을 지닌 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재승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Fast Follower로 성장해온 우리나라의 교육 여건 상, 우리는 국영수 등 결과적 지표를 확실하게 낼 수 있던 인재를 찾아내고자 했었다. 그러나 First Mover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이제는 국영수 등 단순 해답을 내는 교육열에서 벗어나, 본인이 가진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고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인재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게 필요하며 그러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 양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과연 정재승 교수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의구심만 내비친 것일까? 

AI의 발전에 따라 우리 인간이 학습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주장을 한 것일까? 


나는 "개발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며 페이스북 내 '생활코딩' 그룹의 글을 관심있게 지켜봐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은 항상 절대 다수의 부정적 의견에 의해 일방향적 성장만을 일구어 나갔다. 나는 그러한 글들을 보며 자문했다. "흔히 말하는 이 '현직자'들은 본인들이 속한 field의 발전을 싫어하는 것일까? 다수의 다른 사람들의 유입으로 인해 본인들의 field가 훼손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그렇게 나는 '현직자'가 아니기에 명쾌한 답을 찾기 못하였다. 그리고 그 분들의 주장을 그렇게 신뢰하지도, 자주 찾아보지도 않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분야의 공부를 늦게 시작한 입장에서 보자면, 그 분들의 그러한 방어적이고 회의적 태도가 나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재승 교수와 같이 희망적 사고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표하는 것 또한 아니다. 

(나또한 엘론 머스크와 마크 주커버그가 미디어를 두고 펼치는 AI에 대한 논쟁을 재미있게 지켜보는 입장이다.)


그저 정재승 교수가 주장한 것 처럼 '현재의 우리는 미래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 뿐이다. 세상을 경험하며 고민하고, 공부를 하고, 미래를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 '나'라는 사람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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